영화 <히든 피겨스> 감상평
<영화 “히든 피겨스” 를 보고 >
강수화
영화를 보고 있는 내게 둘째아들이 지나는 말처럼 몇 번이나 흘렸다.
-엄마, 「히든 피겨스」 봤어?
-아니.
-아무리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도 두 번 이상 보는 성향이 아닌데, 그 영화를 무려 다섯 번이나 봤다니까, 장담하건대 엄마도 그 영화에 빠져들 거야. 아빠와 함께 꼭 챙겨 봐봐. 정말 감동적이었어.
-무슨 내용인데, 그리 재미있었을까?
-재미라기보다 어떤 사명감, 막중한 사회의식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고등학생이 한 영화를 다섯 번씩이나, 그러고도 대학에 붙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나는 그가 영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전형적인 꼰대부모의 질 낮은 트집으로 그를 나무라곤 했다.
회사에 확진자가 몇 명 발생, 남편이 2주일 동안 집에 못 오고 있었다. 남편이 없는 느슨한 시간이 선물(?)로 주어져 아들이 몇 번이나 봤다는 「마고 리 셀털리」 원작,「히든 피겨스」를 보게 되었다.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케서린 존슨(배우: 타라지 P. 헨슨)은 다른 학생들보다 무려 6 년이나 어린 나이에 웨스트버지니아 입학하고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NASA에 입사, 프렌드 쉽 7호의 궤도 계산, 재진입 지점 등의 중대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아폴로 11호 발사 프로젝트에도 참여한 실존 인물이란다.
영화는 수학 천재 캐서린 존슨 외, 도로시 본(배우: 옥타비아 스펜서), 메리 잭슨(배우: 자넬 모네), 세 명의 흑인여성을 내세워 백인위주의 견고한 벽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내는 유색인종과 백인을 구분 짓는 섹션이 존재하고, 세 명은 당연한 듯 백인구역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동한다. 식당과 휴게실은 물론 화장실까지 엄격하게 구분되어 같은 회사지만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했다.
캐서린 존슨은 지금까지 백인 외, 유색인종이 출입한 전례가 없는 핵심부서에 배치된다. 사무실에 있던 백인들은 흑인여성이 등장하자 마치 외계인이 출현한 듯 놀란 눈으로 그녀를 지켜본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었으며 커피마시는 일부터 화장실까지 철저하게 유색인종으로 구분된 지역에서만 행하도록 했다. 그녀는 생리적 현상이 일 때마다 800미터나 되는 화장실까지 뛰어다녀야했다. 백인직원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일을 하는데도 보수는 임시직원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영화 속에는 늘 우리 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흑인 여성들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고 파괴당할 때마다 등장하는 정의의 용사 「알 해리슨」이 있었다. NASA의 최고 상급자인 그는 익히 캐서린 존슨의 능력을 알아보고, 캐서린이 직속상사와 갈등을 겪을 때마다 그녀 편에 서서 힘을 실어준다. 그녀가 화장실로 자주 자리를 비우는 이유를 알고는, 많은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간의 배설물은 모두 같은 색’이라며 유색인종으로 구분지어진 표지판을 직접 해머로 때려 부순다.
영화는 똑똑했다. 주인공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슈퍼맨이 나타나주기를 기대하는 관객의 심리를 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캐서린이 코너에 몰릴 때마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주인공 편을 드는 해리슨의 모습은 우리나라 역사나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암행어사 출도야!’ 하는 외침처럼,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
전형적인 권선징악 스토리로 구성되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다거나 진부한 면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선(善)이 승리해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악이 멸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과정과 결말을 지켜보는 것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즐거움이며 쾌락인지 모른다. 가장 밑바탕에 존재하는 인간의 선한 본성, 그 본향을 더듬어 찾는 길에 색깔 구분이 있을 수 없기에.
아들이 영화에 대한 평을 물어왔다.
-엄마, 감상평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가끔은 영화나 소설보다 더 비현실적인 현실이 있구나, 하는….
-엄마 수준에 저 영화시나리오를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닐 테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관객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과장되고 꾸며진 부분이 있을 터…, 나도 순진했던 어린 시절엔 TV나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니까.
-영화배경의 60년대보다 30여년이 지난 뒤의 역사에도 여전히 그런 차별이 존재했거든.
-설마? 영화배경은 60년대, 제작된 연도는 2017년, 엄마 아빠는 90년대 미국에 있었는데 무슨 접점이?
아들은 올해로 19세, 주민등록증이 나왔으니 성인의 반열에 올랐고 나름의 가치관이 정립되는 시기다. 저런 영화를 부모에게 추천할 정도면 무슨 이야기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영화 시나리오에 근접한, 그의 부모인 우리 부부 히든 스토리를 펼쳤다.
199X년 남편은 카이스트 석사를 거쳐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우리 부부는 유학중에 태어난 아들을 한국 시부모님께 맡겨놓고 있었다. 남편 유학뒷바라지 하느라 내가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까닭이다.
박사과정 마지막 관문인 디펜스를 ○월에 통과하고, 학위수여식(졸업식)이 다음해 5월에 있었으니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몇 개월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당장 아들을 만나고 싶었으나 미국-한국을 오갈 비행기 값이 없어 졸업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지도교수 일을 도우며,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알바를 하며 비행기 값을 모으고 있었다.
일단 졸업식을 하고, 아이를 데려온 뒤 국내대학 교수자리가 나올 때까지 미국에서 포닥(post doctor)을 하기로, 구체적인 인생 로드맵을 설계하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방위산업체인 L사에 인공위성 무궁화 위성 3호 제작을 의뢰, 계약을 마치고, 조건부로 대한민국 과학자, 공학자 ○ 명에게 기술이전까지 받기로 합의했으며, 그에 합당한 과학자와 공학자를 선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가 주저 없이 그 길로 들어선 까닭은 채 백일도 되지 않은 핏덩이 아들을 한국에 떼어놓고,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운, 더는 그리움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시바삐 아들이 보고 싶어 당근을 덥석 물었다.
외국에 나가면 하나같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갓 박사학위를 취득한 삼십대 초반의 젊고 혈기왕성한 김박사의 가슴 또한 여느 심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우리나라도 자체적으로 인공위성을 만드는 시대가 도래하는구나!”
무궁화위성 3호 어느 부분 설계를 담당하고 있었던 남편은 자부심과 사명감에 의욕이 불타올랐고, 대한민국 위성사업의 미래가 자신의 어깨에 달린 것처럼 피 끓는 애국심으로 임무에 매진했다.
혼신의 정열을 불태웠던 탓일까, L사 중역의 눈에 들었던 남편은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미국시민권을 주겠다며 정규직제의를 해왔던 것이다.
당시 L사 임원 중엔 우리나라 과학자 한 명이 있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스텐포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박사였다.
남편이 L사에서 정규직 제의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무궁화 위성 3호 개발에 참여한 한국인 과학자와 공학자 부부를 이박사 집에서 초대, 우리 부부도 참석하게 되었다.
이박사 집은 미국 여느 상류층들이 사는 지역의 정원과 풀장이 딸린 고급주택으로, 한눈에 봐도 부유층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당에서 가든파티가 열리는 동안 나는 이박사 부인을 잠시 따로 만나 우리 사정을 이야기했다.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명분이었지만 속내는 자랑하려는 의도가 더 컸을 것이다.
-저희 남편이 이박사님처럼 L사에서 시민권 제의를 받아…, 미국에 사시니 어떠신가 해서요.
-남편은 미국에 남은 것을 내내 후회하고 있어요. 저양반도 대학교수가 되고 싶어 했지요. 포닥을 하며 교수자리를 찾고 있던 중 운명적으로 L사와 인연이 닿아…, 돈을 목적으로 자신의 능력이 쓰이는 것을 괴로워한답니다. 중간에 대학교수 제의가 들어왔지만 이미 L사와의 계약 조건 때문에 몸이 묶여…, 가치 있는 일,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박사 부인과의 대화를 오역했다.
-이박사 부인이, 미국에서 상류층 생활을 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고….
-….
-왜 말이 없어?
-그게 그리 간단치 않아.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구.
-나 한국 들어가기 싫어!
-며칠 전 회사에서 이박사 만나 긴 이야기 나누었어.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더라.
-봤잖아! 이박사네 집, 으리으리하지 않았어? 그렇게 살면 됐지, 뭘 얼마나 더?
-이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잖아. 직장에서 내가 이용만 당한다고 생각해봐. 그 삶이 얼마나 피폐할지….
이박사집을 다녀온 뒤 우리부부는 크게 다투고, 며칠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채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속으로 남편이 한국행을 결정할까봐 조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우리부부는 결혼 출발부터 기우뚱 했다. 아들에 비해 며느리가 함량미달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시댁과의 갈등이 앙금처럼 쌓여있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남편 가족과의 끝없이 자잘한 갈등을 피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한국행에 대한 몹시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어느 주말, 남편이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왔다.
-우리 술 한 잔 할까?
술은 남편보다 내가 더 즐긴다. 무뚝뚝한 공대생 남편의 아내에 대한 유일하게 살가운 시그니처라고나 할까, 그가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고자 할 때마다 사용해온 방법이었으니, 분명히 좋은 소식을 선물로 안겨줄 것 같았다.
한껏 고무된 기분으로 부랴부랴 술과 안주로 분위기를 차렸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간다. 남편은 벌써 취기가 올라 얼굴이 버얼겋다 못해 홍당무처럼 익었고, 나는 몇 잔째인데도 아직 정신이 말똥하다. 남편 입으로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진 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 미국에 남기로 했어.”
내가 듣고자 하는 답은 그 한마디였다.
남편은 내가 마시는 술잔에 계속 술을 채우며 본질과 무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분위기를 시들하게 만들고 있었다. 참다 못 한 내가 가로질렀다.
-뭐야, 본론이?
-당신이 실망할 것 같아…, 술기운에라도 감정 완충작용이 필요할 것 같아….
-이런…, 지금까지 나를 엿 먹인 거야?
-잘 들어봐. 우리가 여기 남으면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그럴듯하게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 사회가 백인 우월사상이 얼마나 심한 줄 알아? 특히 위로 올라갈수록 더하다는 거…, 회사에서 말이야, 어느 장소는 백인들만 출입 가능하도록 해놓고 있어. 유색인종은 아예 발도 못들이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일들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어. 왜냐하면 내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미국에 영구히 남게 되는 것을 가정하고 바라보니…, 이박사를 만나고는 완전히 생각을 굳혔어.
-쳇! 기껏 그 말 하려고….
-기껏이라니, 그분은 자진해서 시민권을 받고 L사로 들어간 정규직원이며 임원이야. 그럼에도 여러 가지 제한을 걸어두고, 유태인과 백인들만 출입가능 하도록 만들어진 특정한 장소엔 발을 못 붙인댔어. 당신의 머리만 이용하고 개에게 먹이 던져주듯 월급을 꼬박꼬박 던져주고 있다고 표현하더라.
-어느 회사나 내가 주인이 아니면 머리와 노동력을 내어주고 돈 받는 건데, 그게 뭐 어때서?
-물론 그렇지.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대.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는 느낌만큼 비참한 게 없잖아. 이박사가 지금 그런 상황…. 그분도 중간에 서울 모 대학에서 교수제의가 들어왔는데 L사와의 서명한 조건 때문에….
1999년 9월 5일.
“10, 9, 8, 7…, 3, 2, 1, 0 ignition!”
거대한 로켓이 용광로 같은 불기둥을 내뿜으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물체는 빛의 속도로 창공을 가르며 주황형광색 불빛을 내뿜으며 순식간에 지구 바깥으로 치고 나갔다. 약 7~8분 후 다시 숨죽이는 순간이 다가왔다.
“곧 발사체에서 위성이 분리될 예정입니다. 여러분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두두두둑, 차차차차착, 카카카카칵, 파파파파팍, 타타타타탁, 하하하하학! “
발사체에서 대포알 같은 물체가 앞으로 튕겨져 나가고, 인공위성과 분리된 발사체 파편들이 마치 폭죽놀이 잔해물처럼 산산이 부서지며 허공에서 소멸되어갔다.
“와아우우우! 성공적인 분리가 끝났습니다…, 위성은 곧 자기 궤도로 진입하여 대한민국 상공 어느 지점에선가 자기 임무를 완성할 것입니다…. “
위성이 쏘아 올려지는 순간, 남편의 뇌 속에 저장된 모든 것 또한 발사체 파편과 함께 공중분해 되었다. 남편이 L사의 제의를 거절하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 남편의 기억 속에 저장 된 메모리까지 강제 삭제토록 명령한 뒤, 태평양 상공으로 던져버렸던 것이다.
남편은 십여 년 동안을 대한민국 상공을 배회하다 간신히 우리나라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가 끝난 후, 아들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견고하게 닫힌 그의 방문 안에서 어떤 역사가 꿈틀거릴지, 엄마인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두운 그늘마다 불을 밝히며 ‘암행어사 출도야!’하며 등장했던 알 해리슨처럼, 그의 의식이 정의의 편에서 이 나라는 물론, 인류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작가 강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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